혜미가 결혼했다. 실망이다. 남의 결혼을 축하하지는 못할망정 '실망'이라니. 망언에 가까운 발언이 아닐 수 없지만 솔직한 내 심정이 그렇다.
입사 후, 첫 워크샵.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었지만 매우 어색한...
그러던 어느날. 우리는 지리산을 등반하는 회사 선배들을 불쑥 따라 나섰는데, 아마 우리 둘 다 인생이 매우 무료해지던 시점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등산화도 신지 않은 채, 이를 악물고 그 드넓은 지리산을 오르 내릴 수 없었을 게다.
핑크 모자를 쓴 사람이 나. 내 왼쪽이 혜미다
지리산을 오르며,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사실, 새침해 보이는 혜미가 산에 간다고 했을 때 좀 놀랐었다. 얘가 과연.. 끝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아주 살짝!
내 얼굴이 보기 흉하지만, 혜미의 깻잎 머리가 인상적이어서 올린다
그러나 왠걸? 혜미는 나보다 훨씬 더 씩씩하게 지리산을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힘이 들때면 위 사진처럼 이상한 행동을 일삼으며,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응원해 주었고, 가끔 콧노래도 흥얼 거렸던 것 같다. 그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거니?
그렇게 우리는 그 넓은 지리산 등반을 하는 동안 '친한 친구'가 되어 돌아왔다.
지리산 정상에서. 야호~
혜미와 나는, 취향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매우 다르다. 우리가 성(性)이 다른 관계였다면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친구보다 더 욕심을 낼 수 밖에 없는 '연인'사이었다면 안봐도 뻔할만큼 우리는 많이 다르다.
서로의 글을 보며 가차 없이 꼬집고, 때로는 충고를, 때로는 칭찬을, 때로는 눈물을, 그리고 때로는 웃음을 나눴다. 내가 저지른 지난 2년 간의 사건,사고를 90%이상을 그녀가 알고 있으며, 나 역시 그녀의 사건, 사고를 공유하고 있다. 가슴 깊은 곳에 있는 고민과 한숨까지 알고 있는 우리는, 한마디로 서로의 '판도라의 상자'다. (한쪽이 배신하고 열면 큰일남.)
이 모든게 혜미가 결혼을 한 탓은 아니지만,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이다. 나와 함께 저지르기로 약속한 사건, 사고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치사하게 결혼을 해버렸다.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듣고, 선뜻 축하해 주지도 뭐라 말하지도 못했던 내 마음 속에는 정말 오묘한 그 무엇이 요동쳤다. 애인을 뺏길 기분이랄까.
혜미의 결혼을 축하한다. 진심이다. 그러나 이 인사는 조금 더 늦게 전하고 싶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누구의 며느리가 아닌 '한혜미'로 자리매김 하는 시간을 기다리고 싶다. 결혼하기 전의 혜미 그대로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내조 잘하고 살림도 잘하는, 애도 잘보고, 며느리 노릇도 잘하면서 자기 일도 멋지게 해내는 슈퍼우먼이 되라는 얘기는 아니다. (언론에서 종종 그런 여자들의 얘기를 끌어내 대단한듯 말하는데, 대단하긴 하지만, 그건 미친짓이다) 그렇다고 어떤 역할을 소홀이 하고 가정 밖의 혜미만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혜미에게 닿아 있는 모든 일들을 '가장 한혜미스럽게' 만들어 가길 기대한다.
이 기대는 그녀가 그럴 수 있는 친구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기대다. 그녀가 스케치하고 있는 꿈을, 한껏 지지한다. 잃어버리지도 버리지도 말길. 그날이 오면, 나는 그때 그녀의 결혼을 축하해주겠다.
오랜만에 컴퓨터를 뒤져 영상을 찾아 올려본다. 그립고 아득한 날. 다시는 안오겠지만, 또 다른 추억이 우리를 기다린다고 믿는다.
(역시 곰배령은.. 바람맛이 일품~ )